[랭크5=유하람 칼럼니스트] 보통 '챔피언'이라 하면 기대하는 몇 가지가 있다. 상대를 압도하는 강함, 일격을 허용해도 경기를 뒤집는 저력, 그리고 화끈하게 경기를 끝내버리는 한 방 정도가 되겠다. 때문에 이 요소를 모두 갖췄던 예멜리야넨코 표도르, 반다레이 실바, 마우리시오 쇼군, 조제 알도 등은 큰 사랑을 받았다.
그런 의미에서 마이클 비스핑(38, 영국)은 팬들이 꿈꾸던 챔피언은 아니었다. 그는 물주먹, 소위 '짤짤이'라 부르는 포인트형 아웃 복싱, 화력 좋은 선수만 만나면 정신을 못 차리는 경기력 등 환상을 갖기엔 하자가 많은 선수다. 챔피언 등극 자체도 '교통사고'로 불리는 마당에 벨트 지키자고 온갖 명분 없는 대진에만 집착하다 결국 아래 체급 선수에게 타이틀을 뺏기는 망신을 당해 이미지를 깎아 먹은 점도 크다.
하지만 비스핑을 허접한 챔피언이라 부를지언정 그가 위대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퇴출 한번 없이 4000일 넘게 옥타곤에서 싸우며 UFC 사상 최다출장·최다승을 기록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는 쉽게 평가절하하기 힘든 인물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는 수없이 넘어지면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그는 10년을 도전한 끝에 벨트를 차지했다. 데뷔를 함께 했던 동료들이 은퇴할 때쯤 이뤄낸 결실이었다.
- 승부 근성 DNA
이 모든 이야기의 근원은 비스핑이 중학생이었던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언제나 내 목에 칩을 걸었다”는 회상대로, 그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승부를 즐겼다. 럭비·카누 등 비교적 평화로운(?) 종목을 손 댔지만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하던 중, 15살 비스핑에게는 아주 특별한 기회가 찾아온다. 영국 MMA의 전신 격인 '넉 다운 스포츠 부도' 대회에 출전하게 된 것이다. 토너먼트에서 그는 전 유럽에서 모여든 싸움꾼들과 하루에 네 번도 맞붙었고, 그중 대부분은 이겼다고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단순히 ‘즐겜유저’였던 비스핑이 본격적으로 선수 생활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다름 아닌 가족이었다. 유년시절 가정폭력에 휘말리며 자신도 싸움에 익숙해졌기 때문일까, 그는 파이터라는 직업을 선뜻 선택하지 못하고 있었다. 16살에 일찌감치 학교를 자퇴하고 온갖 궂은일로 벌어먹던 중에도 그는 격투기를 주 수입원으로 삼지 않았다. 그가 프로 파이터라는 마음가짐을 가진 건 아내 레베카를 만나면서부터였다.
가족이 생기자 그는 이제 제대로 된 일자리가 필요했다. 아내와 아이에게 헌신하기로 유명한 그 답게, 그는 한동안 싸움은 제쳐두고 돈을 버는 데 집중한다. 하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가장 잘 하는 일이 싸움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냥 일만 하고 살기엔 자신도 마음이 공허하고, 가족들에게 그리 많은 선물을 줄 수 없다고 확신하게 된다.
- 돈이 필요했던 가장, 영국의 왕이 되다
링에 오르는 데 있어 비스핑은 "그냥 나 하나였다면 그리 절박하진 않았을 것 같다"고 말한다. 가장이라는 짐 때문이었을까. 원체 타고난 싸움꾼이었던 그는 각 잡고 선수 생활을 시작하자마자 돌풍을 일으킨다. 그는 프로 데뷔 2년 만에 10번을 싸워 전 경기 피니시 승을 거뒀고, 중소단체 '케이지 레이지'에서 라이트헤비급 챔피언까지 차지했다.
영국에서 적수가 없었던 비스핑은 UFC 진출권이 걸린 서바이벌 프로그램 TUF 세 번째 시즌에서도 압도적으로 우승을 차지하며 화려하게 옥타곤에 입성한다. 실력과 전적이 증명된 상황에서 훤칠한 키와 잘생긴 외모, 거기에 시원시원한 파이팅 스타일과 입담까지 갖춘 그가 유럽 대표 슈퍼스타가 되는 데는 불과 1년도 걸리지 않았다.
이후 라샤드 에반스에게 첫 패를 당하며 잠시 주춤했지만, 이내 비스핑은 미들급으로 내려가 연승을 달리며 다시금 입지를 굳혔다. 자신이 우승한 TUF에도 9번째 시즌 코치로 돌아오며 금의환향했다. 맷 해밀에게 논란의 판정승을 거두고도 뻔뻔하게 욕설을 퍼부어 논란이 됐을 때도 그는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악역으로 캐릭터를 전환하며 존재감을 확실히 했다.
당시 비스핑의 위상은 단순한 격투 스타를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영국 언론 메트로 지는 ‘2008년 영국에서 가장 멋진 남자 100선’에서 비스핑을 1위로 선정했다. 오아시스의 갤러거 형제, 데이비드 베컴, 제이슨 스타뎀 등을 제친 결과였다. 비스핑은 이미 영국의 국민영웅이었다.
- 좌절, 좌절, 그리고 좌절
TUF 9에서도 진정한 주인공은 마이클 비스핑이었다. 그는 악당 페르소나를 가감 없이 드러내며 상대 코치 댄 핸더슨을 시즌 내내 조롱했고, 코칭 능력에서도 압승을 거뒀다. 그는 라이트급과 웰터급 결승에 영국인 파이터 세 명을 올려보냈고, 결국 영국 팀은 두 체급 우승자를 모두 가져갔다. 이제 남은 건 코치 대 코치 경기뿐이었다. 두 코치는 아직도 종합격투기 사상 최대 이벤트로 꼽히는 UFC 100에서 맞붙을 예정이었고, 비스핑은 여기서도 이긴다면 타이틀전까지도 노려볼 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비스핑은 핸더슨에게 역사적인 참패를 당한다. 핸더슨은 종합격투기 사상 가장 화려한 한 방으로 꼽힐 만큼 커다란 펀치를 상대에게 적중시켰고, 비스핑은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워낙 큰 대회에서 임팩트 있는 장면이 나왔다보니, 비스핑은 이전까지 떨어놓은 입방정의 후폭풍을 정통으로 맞는다. 한층 두터워진 안티팬층은 그에게 조롱을 쏟아냈고, 비스핑 본인도 여기서부터 급격히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다.
2009년 핸더슨 전 패배, 2010년 반더레이 실바 전 패배, 2012년 차엘 소넨 전 패배, 2013년 비토 벨포트 전 패배, 2014년 팀 케네디·루크 락홀드 전 패배. 항상 미들급 랭킹 10위 안에 들면서 대권주자로 거론됐지만 비스핑은 핸더슨 전 이후로 고비마다 귀신같이 패하며 무너졌다. 더구나 이 중에는 약물에 걸리거나 합법적 약물이라 불리던 TRT가 금지되기 전까지 스테로이드를 애용하던 선수가 네 명이나 포진해 있었다. 속된 말로 ‘약빨 뽕 뽑기’ 시즌에 비스핑이 연달아 얻어걸린 셈이다. 이후 비스핑이 금지약물이라고 하면 치를 떨며 검사 강화를 외친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 10년 만에 찾아온 단 한 번의 기회
연이은 ‘미역국’에 격투 커뮤니티에서는 ‘비스핑은 문턱에서만 주저앉다 말 선수’라는 인식이 묘하게 자리 잡았다. 특히 팀 케네디에게 졸전 끝에 패배했을 땐 더는 경쟁력이 없다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실제로 매번 같은 자리에서 무너지는 사이 비스핑은 늙어가고 있었고, 최대 강점으로 꼽히던 체력마저도 예전 같지 않았다. 여전히 톱 10에는 이름을 올렸지만 그 위로 올라갈 가망은 없어 보였다.
어느덧 비스핑의 UFC 데뷔 10주년이 다가오자 이런 여론은 더 짙어졌다. 많은 팬이 그에게 명예로운 마무리와 은퇴를 종용했고, 그가 천신만고 끝에 앤더슨 실바를 꺾었을 때조차 마지막 불꽃을 잘 태웠다며 그를 떠나보낼 준비를 했다. 그런 그가 부득부득 리벤지를 해야겠다며 자신을 이미 압살한 적 있는 챔피언 루크 락홀드를 상대로 준비 기간 2주 만에 대체 출전한다고 했을 땐 모두가 입을 모아 미쳤다고 말했다. 혹여 비스핑을 감싸는 발언이 있었다고 해도 “평생 숙원인 타이틀 전 한 번 하게 두자”는 정도였다.
하지만 누가 격투기에 ‘절대’란 없다 했던가. 비스핑은 기적을 만들어냈다. 격투기 역사상 최장기간 집권을 하겠다고 큰소리치던 락홀드는 오만에 빠져 그를 얕봤고, 반대로 그는 10년 만에 찾아온 다시 오지 않을 기회를 잡으려 신경을 곤두세웠다. 결과는 비스핑의 1라운드 KO승.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승리였고, 패배와 좌절로 얼룩진 비스핑의 커리어가 드디어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그는 더 이상 무관의 제왕이 아닌, UFC 제8대 미들급 챔피언이었다.
- 졸렬한 챔피언, 하지만 위대한 선수
챔피언 등극 후 비스핑은 열심히 흑역사를 만든다. 벨트를 들고 있는 내내 그는 어떻게든 컨텐더를 피하려고 명예회복·드림 매치 등을 내세워 명분 없는 대진을 따내는 데만 혈안이었다. 그렇게 1차 방어전에 이제 은퇴하려는 댄 핸더슨을 ‘예토전생’시켜 세웠고, 그다음에는 닉 디아즈·코너 맥그리거 등을 물색했다. 겨우 낙점한 상대는 무려 4년 만에 돌아온 전 웰터급 챔피언 조르주 생 피에르. 그리고 비스핑은 그에게 벨트를 뺏겼다. 최약체 챔피언이라는 오명도 벗지 못한 채 맞이한 졸렬한 최후였다.
하지만 이런 챔피언으로서 보여준 결점과는 별개로, 비스핑이 남긴 유산이 감동적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중학교 중퇴자가 가족을 위해 싸우기 시작했고, 한계에 부딪혀도 10년을 도전한 끝에 결국 세계 정상에 올랐다. 그는 역대 최고 승률은 없지만 역대 최다 승수가 있으며, 특별한 천재는 아니었지만 특별한 성실함이 있었다. 그가 팬들이 바라던 강한 챔피언은 아닐지언정, 그의 벨트에는 인간미가 가득 묻어있다. 소위 말하는 ‘피플스 챔피언’이라 하겠다.
또, 적어도 그가 얼마나 선수로서 프로페셔널하며 얼마나 격투기를 사랑하는지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그 긴 커리어 동안 계체에 실패하거나 부상 때문에 경기를 취소시킨 적도 없다. 벨트 들고 도망 다니던 시절에도 경기를 펑크 낸 일은 없었다. 신경 문제로 오른손이 꽉 쥐어지지 않아도, 하이킥을 맞고 망막이 분리됐어도 그는 싸웠다. 이룰 만큼 이루고도 계속 싸우는 이유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건 항상 내가 즐겼던 어떤 것이고 항상 나 자신이 자랑스럽게 만드는 어떤 것이었어. UFC가 나를 오스트레일리아나 마카오나 아니면 다른 새로운 지역으로 데려가고 나는 메인이벤트에서 세계 각지에서 온 다른 X발 종마들이랑 싸우는 것보다 나를 흥분시키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 그게 날 움직이고 내가 훈련을 하고 싶게 했고”
한편 켄달 그로브는 비스핑의 동료의식에 대해서도 한마디 거든다. 그가 한창 슬럼프에 빠져 UFC에서도 쫓겨날 상황이었을 때, 비스핑은 선뜻 필요한 훈련비와 경비를 모두 내겠다고 나섰다고 한다. 덕분에 그로브는 재기에 성공했고, 그는 비스핑에게 “커리어 전체를 빚졌다”고 말하곤 한다. 비스핑이 격투기를 대하는 데 있어 단순히 입신양명, 재미만을 위함이 아닌 진정 애정을 품고 있다고 비치는 부분이다.
- 굿바이 비스핑
어느덧 비스핑은 진짜로 은퇴를 눈앞에 두고 있다. 평생의 숙원도 다 풀었고, 커리어도 쌓을 만큼 쌓았다. 이제 40을 바라보고 있으며, 최근에는 13년 커리어를 통틀어 최초로 연패를 당하기도 했다. 비스핑 본인도 서서히 은퇴에 대해 입을 열고 있다. 이제 정말로 그를 보내줄 때가 오고 있다.
그가 떠난 자리는 어쩌면 그렇게 크게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저 불안 불안했던 베테랑 하나가 떠났을 뿐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UFC 로스터에서 그를 찾는 일이 많아지지 않을까. 아주 전부터 엄청난 존재는 아니었지만 존재감은 컸고, 천하무적은 아니었지만 또 꾸준히 이겼듯이 말이다. 마이클 비스핑. 그는 누구보다도 인간적인 챔피언으로 오랫동안 팬들의 기억에 남을 것이다.
유하람 칼럼니스트 droct8969@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