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프로 입식격투기 단체 10년차 MAXFC 이용복 대표 "MAXFC 개최 이유? 후배들에 대한 환원"

2025-03-15     정성욱 기자
이용복
이용복

랭크파이브=정성욱 기자

MAXFC는 국내를 대표하는 프로 입식격투기 대회 가운데 하나다. 2015년 프로 무대가 없는 상황에서 '입식격투기의 부활'이란 기치를 내세우고 대회를 2015년 8월 29일 첫 대회를 익산에서 열었다. 어느덧 강산이 변할 10년이 지나 MAXFC는 30회를 맞이했다. 넘버링 대회만 30회, 준프로리그인 '퍼스트리그'까지 합치면 70회 가까운 대회를 치르며 국내 입식격투기 흥행과 발전에 기여해왔다.

10주년 대회를 앞두고 랭크파이브가 14일 MAXFC 이용복 대표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10년간 이어온 대회사 MAXFC, 그리고 그와 관련된 에피소드, 입식격투기 대회사를 운영해오며 느낀 것들, 한국 입식격투기의 현실 등에 대해 들어봤다.  

- 20주년 축하드린다. MAXFC의 시작은 어떻게 됐는지?
2015년 4월 정도에 시작했다. 그때 심판하실 분들이랑 같이 움직일 분들을 익산에 초대해서 밥 먹고 여러 가지를 이야기했던 것 같다.

- 당시 입식격투기 프로 대회가 거의 없었다고 들었다.
당시엔 MMA 관련된 대회, 사업이 한창 성장하는 단계였다. 근데 입식, 뭐 킥복싱이나 무에타이 프로 시합은 없었던 때였다. 이를테면 조명을 받으면서 입장하는 그런 무대가 완전히 없었다고 보면 된다. 당시에 부산에 대회가 있어서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입식 관장님들이 많이 모였다. 한 14명 정도? 그때 요청이 좀 많았다. 입식 프로 시합이 있었으면 하는 요청.

MAXFC
MAXFC
8월
8월

- 그 요청을 본인이 짊어지고 갈 필요는 없지 않았는데, 프로 대회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이유는?
짊어지고 간다고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내가 케이지, 링을 설치하고 대여하는 사업을 하다 보니 종합격투기(MMA) 대회에도 종종 가는 경우가 있었다. 그때도 한 MMA 대표가 나를 격려하며 입식 대회를 만들어보라고 했던 적도 있었다. 어찌 보면 MMA 쪽에서의 요청 같기도 했다. 입식격투기가 MMA 선수들에게 기초가 되는 종목이 되기도 하니까. 개인적으로 생각해도 당시엔 10년 전 무대보다 못한 초라한 대회들만 있었다. 그래서 선수들이 조명을 받는 대회를 한 번 만들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 당시 상황을 좀 더 물어봐야겠다. 일본 K-1이 사라지면서 국내 입식에도 영향을 줬다. MAXFC를 설립할 당시, 국내 입식 프로대회가 하나도 없었나?
그냥 아예 없었다. 하나도. 프로라고 부를 만한 시합이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짐매치(비교적 큰 개인 체육관에서 여는 격투기 대회)도 몇 없었다. <파이터 붐(전라권에서 진행하고 있는 준프로 대회)>, <전사의 연대기> 정도만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생활체육 기반으로 하는 아마추어 대회는 좀 있긴 했다.

- 프로 대회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대회를 연지 벌써 10년이 됐다. 그리고 10주년 대회를 MAXFC가 태어난 익산으로 돌아와 대회를 열게 됐다. 그간 10년을 뒤돌아본다면?
MAXFC를 시작하면서 생각했던 계획이 있었다. 한 3년 정도 투자를 하면 탄탄한 중견 단체의 면모를 갖출 거라 생각했다. 근데 그게 쉽지 않았다.  돈은 서울과 같은 큰 도시에서 돌고 있는데 내가 지방에 있다 보니 인맥적인 한계도 좀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또한 MMA에 비해선 비즈니스적 측면에서 떨어진다는 관측도 많이 있었다. 당시엔 인정하지 않고 노력했지만 지금은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누군가는 나에게 MMA로 바꿔서 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년 동안 입식격투기 대회를 이끌어 온 건 어떤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업적인 신념보다 입식격투기 선수 출신인 내가 이 운동을 후배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고 싶었다. 10년이란 세월을 꿋꿋하게 해왔던 건 개인적인 이익이나 명예보다 '후배들에게 희망을 심어준다'는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사실 코로나 팬데믹이 오기 전까지 점차 성장을 해오고 있는 중이었다. 점차 피크를 치고 있었다. 자리를 잡아야 했던 그 시기에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성장세가 꺾였다. 메르스는 아무것도 아니었다.(*MAXFC는 첫 대회를 메르스 때문에 연기했어야 했다.) 코로나 팬데믹은 국내 대회사에게 큰 어려움을 줬다. 거의 3년을 쉬고 다시 시작해야 했으니까. 정말 힘이 많이 붙였다. MAXFC를 처음 시작했을 때가 40대였는데 어느덧 50대, 아니 이제 60대를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그러다 보니 전처럼 공격적인 활동은 하기 어렵고 경제적인 상황도 전과 달라 사실 겁도 많이 난다.

이용복
MAXFC는

- 그래도 국내 입식격투기 프로 대회사 가운데 1위 단체를 만들었다는 건 큰 자부심일 텐데.
MAXFC도 MAXFC 지만 하나의 단어를 정착했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싶다. MAXFC를 시작하면서 '입식격투기'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했고 그 단어가 많이 정착됐다.(*과거엔 입식타격, 입식타격기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다) 종합격투기는 MMA라는 약자가 있다. 우리도 뭔가 부르기 쉬운 단어를 만들어 사용하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SMA(Standing Martial Arts)라는 줄임말을 사용하고 싶었다. 주위에 조언을 많이 구했는데 SMA라는 단어가 사회적인 단어로 자리를 잡기는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래서 생각한 단어가 '입식격투기'였다. 

지금은 누구나 입식격투기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서 그래도 MAXFC를 10년 동안 하면서 뭔가 상징하는 단어를 만들고 사람들에게 사용하게 만들었다는 보람은 있다. 그래도 SMA를 사람들이 사용했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은 여전히 갖고 있다.(웃음)

- 10년간 MAXFC를 운영하면서 많은 선수들을 육성했다. 10주년 메인이벤트에 서는 김준화, 과거 헤비급 챔피언 권장원은 K-1에 다녀오기도 했다. MAXFC가 죽어가던 입식격투기에 불을 댕기고 활성화시켰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 근데 아쉬운 건  MAXFC를 시작할 때 계획했던 선수들 처우를 생각대로 개선하지 못했던 부분은 여전히 아쉬움으로 남는다. MAXFC를 시작하면서 메인급 선수들에게 1년에 안정적으로 4번의 경기를 뛸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대전료만 연간 2천에서 3천만 원을 받고, 여기에 본인 개인 경제활동까지 더하면 최소한 3천에서 4천, 많게는 5천 정도의 수익 구조를 가져갈 수 있도록 하는 토대를 만들고자 했다. 이 목표를 이루지 못해서 너무 아쉽다. 이번 대회도 너무 어렵다 보니까 제대로 된 파이트머니를 지급하지 못하고 삭감된 금액을 지급하게 됐다. 너무 아쉽고 안타깝다. 

내가 선수들한테 몇 번 이야기한 것이 있다. 나도 입식격투기를 했고 이 분야에서 사업을 하면서 돈을 벌었다. 그리고 거기서 번 돈을 MAXFC를 열어 후배들에게 사용하는 거다. MAXFC에서 성장한 선수들도 이렇게 후배들에게 기여를 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MAXFC 소속 선수들이 아니더라도 입식격투기로 활동하고 유무형 상으로 이득을 얻었다면 받은 만큼 베풀어서 선순환이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MAXFC를 만들고 운영하면서 후배 선수들에게 조그마한 발판을 만들어준 점은 지금도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언제까지 이 길을 가야 할지는 모르겠다. 한번 하는 데까지 해볼 생각이다. 더 좋은 방향이 생기기를 기대하면서. 정말 작은 바늘구멍에 어떻게든 실을 넣어 꿰어 내겠다는 마음으로 꿈을 버리지 않고 노력하고 열심히 노력하겠다. 노력하면서 방향을 찾다 보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겠나.

- 10년간 하면서 가장 좋았던 순간과 아쉬웠던 순간이 있었다면?
10년 동안 치렀던 모든 대회가 좋았다. 준비 과정은 어려웠지만 그래도 좋았다. 시쳇말로 링이 무너져도 좋았다.(웃음) 좋았던 순간이 언제냐고 한다면 선수들이 경기를 치르기 위해 신나는 음악과 희망찬 모습으로 입장하는 걸 볼 때가 제일 신난다. 아쉬운 순간이라면 지고 내려온 선수들을 볼 때다.  그런 선수들을 안아줬던 기억들이 많이 있다. 우승한 선수들은 많은 관심을 받지만 지고 내려오는 선수들은 그 관심을 못 받지 않나. 진 선수들이 무대에서 내려와 퇴장할 때 그의 편에 서서 안아 줬다. 아마 내가 선수를 해봤기에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했던 것 같다.

MAXFC

- 10년 동안 대회를 치르면서 특별한 에피소드는 없었나?
처음 서울에서 치렀던 <MAXFC 03>이 생각난다. 동대문에서 치른 대회였는데 정말 힘들었다. 스폰서 없이 100% 자비로 대회를 열었다. 어떻게든 돈을 아껴보려고 이재훈 총감독과 마지막까지 남아서 청소를 다 했다. 당시엔 경기 후에 청소 용역을 섭외했어야 했는데 그것조차 몰랐다. 둘이서 마지막까지 청소하면서 눈물이 글썽했던 기억이 난다. 동대문 대회는 정말 여러모로 힘들었다.

- 선수들이나 관계자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바라는 건 많이 없다. 그저 MAXFC라는 단체에 대한 애정을 가졌으면 한다. 선수, 관계자들이 애정 어린 모습들이 보일 때 나 스스로도 열심히 해야겠다, 포기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계체량 행사 때 김준화 선수가 보여준 모습, 열심히 뛰려고 하는 선수들을 보면 지금 그만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고 힘이 불끈불끈 생긴다. 김준화 선수뿐만 아니라 여러 선수들의 열정 어린 모습을 보면 이 무대를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김준화

- 10주년, 다시 익산으로 돌아왔다. 올해를 기점으로 MAXFC는 어떤 방향으로 나갈 것인지?
지금은 무리하게 큰 시합을 열 생각은 없다. 익산 대회 이후로 한 번의 시합을 더 하려고 계속 알아는 보고 있다. 작년에는 어떻게 해서든 두 번의 시합을 개최했다. 창원에서도 크게 대회를 열기도 했고. 현재 서울 쪽 지인분들이 연락이 오셔가지고 이야기를 진행하는 중이다. 물론 성사가 돼야 대회를 열 수 있는 거니까. 정리하자면 올해도 넘버 시리즈 대회를 한 번 더 열 생각이다. 그래서 1년에 넘버 시리즈 두 번을 열기 위해 노력하겠다.

- 마지막으로 한 마디
크게 할 말은 없다. 아직 성공을 하지 못한 단체라고 생각하기에 어떤 이야기를 해도 인정받을 멘트는 없다고 본다. 더 잘해서 더 좋은 단체가 됐을 때 좋은 멘트를 하겠다.(웃음) 고마운 걸 이야기하자면 10년 동안 항상 같은 팀이 되어 준 집행부, 심판부, 그리고 이벤트 하시는 분들께도 감사하다는 말씀 전한다. 입식격투기를 비롯한 격투기를 사랑하는 팬분들께도 감사 인사를 전한다.